냐눔과 섬김의 예배공동체 한백교회
20260104 한백교회 하늘뜻펴기 이상철 목사
2026년 신년 메시지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시편 23:1-4)
1. 송구영신예배 때 ‘말씀카드뽑기’ 해본 적 있지 않나요? 전도사시절 밝고 긍정적이고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되는 성서구절들을 뽑고 출력하고 코팅하면서 송구영신예배 준비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인터넷 뒤지고 교인들 설문조사하고 얻은 답변은 한국교인들이 좋아하는 성경구절 best 10에 1위가 시편23편이었습니다. (25년 전쯤에는 지금은 ?) 2위는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 3위는 산상수훈 순이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송구영신예배때 받고 싶어하는 성경구절은 따로 있었습니다. 이사야서 41:8-10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2. 유학 전 부목사 시절 1월 첫 주오후 예배 설교 때 이사야 41장 본문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송구영신예배때 받고 싶은 성경구절로 여러분들이 선호했던 구절이 이사야 41장이었습니다”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너를 지명했다”는 하느님의 음성과 “내가 너를 버리지 않았다”는 신의 약속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을까요? 하느님의 구원과 위로가 아니면 하루라도 살 수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구절은 삶의 희망과 용기를 제공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사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된 하느님의 은혜를 누리는 한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라고 설교를 마쳤어야 했는데 그만 저는 쓸데 없는 사족을 달고 말았습니다.
3. 이 구절은 물론 당연히 너무나 은혜롭고 우리로 하여금 용기를 주는 구절이지만 그 말씀이 우리 안에만 있고, 상대방을 향한 환대의 메시지로 전환되지 못할 경우에는 배타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위험도 있습니다. 그것이 자칫 우리 밖의 타자를 상정하고 내부자들끼리 연대의식을 강화하는 파시즘의 동력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교도 척결을 위해 십자군 원정을 떠나는 병사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함께 하겠다, 놀라지 말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는 구절이 얼마나 힘이 되었겠습니까? 지리상의 발견 후 식민지 경영 전에 서구의 열강들은 선교사들을 먼저 오지로 보냅니다. 선교사들이 복음의 열정으로 미지의 대륙을 향해 갈 때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는 주님의 음성에 얼마나 의지했겠습니까? 하지만 선교사 파송 후에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 등지에서 벌어졌던 서구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만행은 차마 입에 올릴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고 비참합니다.
4. 당시 설교의 결론을 이렇게 맺었습니다. 이사야 41장은 은혜로운 구절이지만 서구역사의 어느 한 순간에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의 매카니즘을 정당화하는데 일조했다고 말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이런 역사적이고도 정치. 사회적 맥락까지 고려하면서 읽는 한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고 내려왔는데 분위기가 싸한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그 부목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배 후에 담임목사님이 부르셨어요. “아니 학교에서 세미나때 토론하는 내용을 여과없이 날것 그대로 설교하면 어떡합니까?” 철없던 부목사시절 저의 흑역사였습니다.
5. 그때로부터 20년이 훨씬 지났고, 저는 담임목사 11년차로 접어들었습니다. 지금의 저는 부목사 시절과 너무 달라졌습니다. 저의 신앙이 진보한 것인지 퇴보한 것인지는 여러분들이 판단해 주십시오. 담임목회를 11년이나 하다보니 2026년 올 한해 한백 교우 한분 한분이 이사야 본문처럼 “내가 너를 지명했다”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너를 버리지 않았다”는 약속을 신으로부터 받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전에는 이렇게 말하면 좀 쑥스럽고 민망한 마음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마음도 없습니다. 여러분들 올 한해 하느님께 지명당하고 찜 당해서 주님이 주시는 복을 한없이 받기를 소원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오늘의 하늘뜻나누기로 넘어가겠습니다)
6. 시편23편은 다윗이 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다윗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성경에서 가장 빈
번하게 언급되는 사람 이름이 다윗이 아닐까 싶어요. 구약성서 800번, 신약성서에 60번 나온다고 합니다. 그 만큼 다윗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반증이고, 어떤 이데올로기기적인 조작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윗에 대한 추앙은 도가 지나침 감이 없지 않습니다. 다윗하면 제일 먼저 떠오는 것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입니다. 다윗의 정치적 입지가 마련된 사건이었습니다. 그 후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의 메인으로 화려하게 등장합니다. 사울과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다윗은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부족국가에서 통일국가 이스라엘의 기틀을 마련합니다.
7. 잘나가던 다윗에게 위기가 닥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한 사건입니다. 심지어 다윗은 사령관 요압을 시켜 우리야를 최전방으로 배치해 죽음을 맞게 합니다.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나서 저로 맞아 죽게하라”(삼하11:15) 이렇게 보면 다윗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성경에 900번 가까이 언급될 정도로 훌륭한 인물은 아니지 않을까 싶습니다. 막장 드라마의 악역을 맡은 주인공이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 물불을 안가리던 인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사람이 권력을 쟁취하나 봅니다. 사무엘하 12장에 보면 다윗의 이러한 악행에 대해 야훼가 예언자 나단을 통해 비판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어찌하여 나 주의 말을 가볍게 여기고, 내가 악하게 여기는 일을 하였느냐? 너는 헷 사람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다. 너는 그를 암몬 사람의 칼에 맞아서 죽게 하였다. 너는 이렇게 나를 무시하여 헷 사람 우리야의 아내를 빼앗아다가 네 아내로 삼았으므로, 이제부터는 영영 네 집안에서 칼부림이 떠나지 않을 것이다.”(삼하12:9-10) 한마디로 최악의 저주를 퍼붓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체로 나단의 예언은 실제로 이루어집니다.
8. 다윗은 헤브론에서 6명의 아들을 두었고(삼하3장), 예루살렘에서 13명의 아들(삼하 5장)을 낳았습니다. 전체족보상으로 다윗은 장남은 암논, 그런데 암논이 이복 여동생 다말을 범하는 사건이 발생. 다말의 친오빠 압살롬은 이에 분노하여 암논을 살해하고, 아버지 다윗에게까지 반란을 일으켰다가 군사령관 요압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세자 순위로 1,2,3위가 죽었으니 아도니야가 다음 왕이 되어야 합니다. 다윗의 노쇠로 인한 레임덕 상황이 발생하면서 포스트 다윗 시대를 누가 차지할 것인가, 라는 권력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그것은 다윗 구파와 신파의 대결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윗 구파는 헤브론 시대 때부터 함께 했던 사람들이고, 신파는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기고 나서 형성된 인맥들입니다. 구파는 아도니야를 중심으로 뭉칩니다. 요압 사령관, 아비아달 제사장이 여기에 있습니다. 신파는 솔로몬을 중심으로 뭉칩니다. 사독 제사장, 밧세바가 이쪽 진영에는 있습니다. 다윗이 죽자 왕위를 계승한 솔로몬은 아도니야와 요압을 처형하고, 아비아달을 추방시킵니다.
9. 다윗은 돌이켜보면 참 불쌍한 사람 같습니다. 본인 스스로 요압장군에게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고, 자신의 장남이 당신의 딸을 욕보이는 것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압살롬이 자신의 형 암논을 죽이고, 솔로몬도 왕이 되고자 형인 아도니야를 죽이는, 자식들끼리 죽고 죽이는 비극적 일이 발생했습니다. 아마도 다윗은 죽어가면서 이렇게 불행한 가족사를 보면서 나단의 예언이 떠오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다윗 다음 왕위에 오른 솔로몬도 참 불행합니다. 솔로몬은 자라면서 칼의 논리를 보고 배우고 체득하면서 성장합니다. 아비가 자식을 죽이고, 형제끼리 서로 죽이고 죽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본인도 권력을 잡고 지키기 위해 형을 죽이고 아버지의 평생 측근들을 제거해야 했습니다. 솔로몬을 지혜의 왕이라고 하는데, 솔로몬에게 있어 지혜는 칼의 논리입니다. 언제 어떻게 정확히 상대에게 칼을 겨눌 것인가, 이것이 지혜인 셈이죠.
10. 솔로몬의 재판이 유명하죠. 솔로몬이 재판에서 칼을 가지고 아이를 반으로 가르라는 명을 내린 것이 명판정이었다고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그 재판에는 솔로몬이 그동안 문제를 해결해오던 삶의 방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본문을 솔로몬의 지혜가 빛났던 명장면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발휘해 그런 판정을 내린 것이 아닙니다. 그냥 해오던 대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의 생모가 솔로몬에게 어떤 깨달음을 줍니다. 칼의 논리가 아닌 생명애를 가지고 아이를 살라달라고 애원하는 어머니의 진정어린 호소를 보면서 생명을 살리는 지혜가 솔로몬에게 임했던 것 아닐까요. 암튼 다윗도 불쌍하고 솔로몬도 짠하고, 암살롬, 아도니야, 밧세바, 우리아, 다말, 암논...그 밖에 성서에 기록되지 않은 다윗의 딸들도 있었을 텐데 하나하나 그려보고 싶은 생각이 드네요.
11.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23편은 다윗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썼을까요?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가지전까지 목동이었으니까 목동시절에 쓰여진 것일까, 아님은 죽기 직전에 예루살렘에서 모든 것을 회고하고 회상하면서 인생의 말년에 쓴 것일까, 아니면 다윗이 실제로 사울을 피해 광야로 도망쳤고, 아들인 압살롬을 피해 도망다녔으니까 그때 쓴 것일까요. 분명한 것은 다윗이 인생의 절정에서 이 시를 쓴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이 시를 썼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시편23편은 인생의 급박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위로와 용기와, 그리고 비움을 선사합니다.
12. 작년 이 맘때 우리 모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2024년 1월 13일에 서부법원 폭동이 있었잖아요. 그리고도 한참 동안 지지부진하게 사태가 흘러갔습니다. 제 인생에서 있어 무척 힘들었던 기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박근혜, 이명박 때는 한국에 없어서). 어떻게 그 기간을 지났는지... 지금 회상하면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셨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합니다. 그 고난의 끝에서 2024년 마지막 날에 마지막 결실이 우리에 주어진 것 같았습니다. 김호철 선생님 감사원장으로 선임되고 임명되는 것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13. 오늘 2026년 첫 주일입니다. 올해는 무슨 일이 있을까요? 또 선거가 있는 해입니다. 그래서 한동안 시끄럽겠죠. 세계적으로 극우주의 열풍이 한창인데 이것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도 주의깊게 살펴야 합니다. 한백은 내년이 창립 40주년이라 올해부터 사브작사브작 뭔가를 해야할 것 같습니다. 한백식구 여러분들 올해 2026년 바라는 것들이 뭐가 있을까요? (Pause) 엔트로피법칙이라고 있죠. 물리학에서 말하는 ‘열역학 제2법칙’입니다. 에너지 보존 법칙이라고도 합니다. 이것을 제 나름대로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2026년이라는 제한되고 밀폐된 시간과 공간에 있는 전체 에너지의 총량을 100이라고 가정합시다. 거기에는 행복의 에너지도 있고, 불행의 에너지도 있고, 기쁨의 에너지도 있고, 슬픔의 에너지도 있습니다. 그 각각의 에너지는 고르게 분포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우주의 질서입니다.
14. 올 한해도 우리는 이런 저런 기운과 에너지들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할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기쁘고 복된 일이 생기면 함께 감사하고 즐거하는 한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혹 슬프고, 절망스럽고, 어쩌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 같은 괴로운 일이 생기더라도 한백 식구들끼리 서로가 서로에게 주님의 음성이 되어, 주께서 함께 하시니까 한백이 있으니...서로 다독이고 곁을 지켜주면서 한해를 지났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제가 여러분들에게 바라는 2026년의 소망과 기대가 아닐까 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