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년 여름 어느 날, 우리 부부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한국신학연구소의 박성준 학술부장과 안병무 박사로부터 보내온 초대장이었다. "교회가 난립하여 그 사회적 역기능이 심각하게 표출되고 있는 이 시점에 우리는 또 하나의 교회를 세우려 한다"는 역설적인 내용이었다고 기억된다.
신학 연구소의 월요신학서당을 통하여 민중신학이라는 새로운 신학에 처음으로 접하게 된 우리 부부에게는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는 기꺼이 그 초대에 응했고 지금도 한백교회의 첫번째 예배에 참석하였던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에 우리 부부가 낄 수 있었다는 사실에 아직도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민중신학에 근거한 성서 해석은 언제나 새로웠으며 우리 나름대로의 예배 형식을 가꾸어 나가는 매주 매주가 놀라움과 기대의 연속이었다. 다음 주에는 어떤 새로운 일이 생길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한 주를 보내기도 하였다. 당시 운동권에서만 불리던 노래들이 찬송가를 대신하였으며, 그 당시 사회 상황을 반영하는 분노와 적개심 그리고 투쟁을 노래하면서 우리 예배는 그렇게 우리를 의식화시켜 나갔다.
'우리들에게 응답하소서 혀 짤린 하느님, 우리 기도 들으소서 귀먹은 아버지. 얼굴을 돌리시는 화상 당한 하느님, 그래도 나에겐 하나뿐인 민중의 아버지. 하느님 당신은 죽어 버렸나? 어두운 골목에서 울고 계실까? 쓰레기 더미에 묻혀 버렸나? 민중의 아버지.' 이렇듯 불경스러운 '민중의 아버지'를 노래하며 이렇게 예수의 길을 따랐던 수많은 얼굴들을 되새기게 하였다.
원통하게 죽어간 수많은 이름 모를 사람들, 수배당하여 쫓기는 수많은 사람들, 외로운 투쟁을 벌였던 서준식과 온 몸에 화상을 입었던 서승 형제들, 20년 장기수 신영복 선생, 13년의 장기수 였으며 당시 우리들의 스승이었던 박성준 선생, 그리고, 새벽 쓰린 가슴에 찬 소주를 부어야 했던 박노해의 아픔, 이 모든 것들이 나의 그 알량했던 양심에 비수를 꽂았다.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40여 년을 일말의 회의도 없이 하느님에 대한 충실한 믿음과 열정적인 신앙 활동, 그리고 열렬한 기도 생활을 해왔던 나에게 있어서, 그리고 역시 정통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신앙심 깊으신 부모님 밑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온 집사람에게 있어서 하느님에 대한 민중신학적 접근은 사실 충격적이었다.
또 우리는 누구보다도 모범적으로 살아왔고 법과 질서를 존중함은 물론 양심이 명하는 대로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왔다고 자부하던 우리에게 한백의 예배를 통하여 알게 된 양심수라는 단어 또한 실로 혼란스러웠다. 지금까지 잘 살아왔다고 하던 나의 삶이 나 자신에 의하여 송두리째 부정당하게 되었고, 그 동안 너무나도 잘못 살아왔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결국 나는 그들의 구두 끈조차 맬 자격이 없는 인간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적 품위를 유지하지 못하고 살아야 하는 공단의 공돌이, 공순이들의 생활을 비웃으며 그들을 도덕적으로 멸시했던 나는,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을 "안식일도 지키지 못하고 정결 의식도 지키지 못한다"고 비난했다가 예수로부터 "뱀 같은 놈들"이라고 욕을 먹어야 했던 바리사이의 한 사람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의식화 되어 가던 우리는 6월 항쟁의 최루 가스 속에서 수없이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역사의 전면에 한걸음 더 가까이 서게 되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역사의 방관자였던 우리는 운동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합류 하면서 당시 운동의 목표였던 "그날"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었다. 역사의 수레를 돌리는 민중의 힘찬 함성과 함께 "그날"의 태동을 온몸으로 체험하였다. "그날…" 참으로 우리를 전율 하게 하던 한 마디였다. "그날이 올 때 까지", "그날이 오면", "그날은 오리라", 수많은 노래들이 "그날"을 노래하였고 무수히 많은 전단들이 "그날"을 이야기하며 뿌려졌다.
아무도 "그날"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았고 또 누구도 애써 설명하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우리 모두는 "그날"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알고 있었다. 아득한 절망 속에서도 우리는 "그날"을 노래하였다. 벅찬 기쁨으로 "그날"을 노래 한 적도 있었다. 깊은 분노와 슬픔 속에서도 우리는 "그날"을 노래하였다. 이렇게 "그날"은 역동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날"은 다시 멀어져 갔고 지친 우리는 좌절하였다. 하지만 그 깊은 좌절 속에서도 우리는 "그날"이 태동하고 있다는 것을 체험하였다. 그 체험은 우리 선배들이 4·19 혁명 속에서 가졌던 새 질서에 대한 체험이었으며, 짜르의 폭정을 무너뜨린 러시아 민중들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체험이었으며, 전봉준 홍경래가 새날의 도래를 확신하며 가질 수 있었던 바로 그 숭고한 체험이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2천년 전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이 모두 함께 공유하였던 바로 그 소중한 체험이었다.
우리가 그토록 온몸으로 염원하던 "그날"이 예수가 이미 선포한 하느님 나라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사실은 좌절하였던 우리를 다시 서게 하였다. 10년 전 여름 우리 부부에게 보내졌던 그 초대장은 이브가 아담에게 건네어 준 금단의 열매였다. 우리는 기꺼이 그 열매를 먹었고 그 결과 닫혔던 우리의 눈은 뜨여지게 되었다. 그동안 나를 가리고 있던 그 모든 위선과 허식이 벗겨지자 알몸뚱이뿐인 나 자신을 발견하고 부끄러워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안주하여 왔던 낙원에서 추방당하였다.
더 정확히 말하여 우리는 더 이상 에덴 동산의 노리개이기를 거부하였고, 민중과 함께 고민하며 고뇌하는 새로 태어난 인간임을 선언하였다. 한백은 이렇게 우리를 변화시켰다.
- 김승호
용두동에서 사당동으로, 사당동에서 연남동으로, 그리고 다시 과천으로! 10년간 우리의 예배터가 네 곳이나 된다. 옮겨다닌 지역도 만만치 않게 먼 거리다. 혹 누군가 우리의 이사 행적에 대해 듣는다면, 모르긴 해도 굉장한 시련과 격동을 겪은 문제 교회쯤으로 생각할 듯싶다. 그렇지만 이 네 곳을 다 거쳤고, 어느 때건 교회의 구동 엔진에서 꽤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나로선, 누군가의 있을 법한 이런 평가에 다소 낯설어할 것 같다.
적어도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한백의 모습은 일그러진 주름살 같은 얼굴이 아니다. 어려웠다는 기억도 대개는 잔병치레 같은 가볍고 일상적인 흔적 정도로만 기억될 뿐. 하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사당동 시절의 한백이 내겐 가장 힘겨웠던 시절로 기억된다. 아마도 어느 만큼은 한백의 태동기인 용두동 시절이 너무 벅차게 감격스러웠던 탓이리라.
1990년 1월, 사당동 예배터에 처음 들어섰을 때, 우리는 퍽 만족스러웠다. '너른마당'이라고 쓰인 현판, 아이들이 말뚝박기 놀이하는 모습이 그려진 판화를 비롯한 몇몇 글·그림 등이 세 벽면에 조화롭게 걸려 있었고, 정면엔 커다란 책상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뒤로 전체의 1/4쯤을 가르는 '자바라'가 쳐 있다.
당연한 것이지만,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린 공간 구도는 강당을 빌어쓰던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중량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여느 교회에선 결코 느낄 수 없는, 경망스럽지 않은 참신함이 가슴을 설레게 했다. 한국신학연구소가 천안으로 이사감에 따라 독자적인 예배터를 마련하게 됨으로써 맞이하게 된 설레임이다.
그런데 강당을 빌어 모임을 갖는 것에서 고유한 예배터를 갖게 되는 것으로의 변화, 그것은 첫 인상을 묘사하는 그런 단순한 변화에 그치지 않았다. 이제 사당동 예배터라는 장소의 의미가 막대해진 것이다. 무엇보다도 장소와 관련한 비용의 과도한 증가를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 '지역성'이라는 조건을 우리의 정체성에 얼마만큼 담아내야 할지를 고려해야 했다. 그밖에 예배가 없는 나머지 6일간의 여백은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도 고민거리였다. 용두동에서라면 문제로 여길 필요조차 없었던 새로운 과제들이 제기된 것이다.
더불어 '목회사역자'라는, 한백에선 다소 껄끄러운 어휘가 심각하게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새로운 질문이 던져졌다. '평신도교회와 목회사역자 간의 관계는?' 그냥 물 흐르는 대로, 감정이 이끄는 대로 자신을 내맡기기만 하면 됐던, 그것으로 충분히 감동스러웠던 교회는 이제 옛날 얘기가 돼 버렸다. 새로운 고민거리들이 너무 무거웠다.
게다가 1987년 이래 지속된 몇 년간의 카니발은 이제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해버린 뒤였다. 축제의 향내가 증발한 뒤, 무대와 객석이 모두 비어버린 현장에 외롭게 서서 축제 같은 예배를 재연하자니, 공허감을 감출 수 없었고, 그만큼 실망감이 배가됐다. 가라앉은 분위기는 한백식구들의 자발성을 감퇴시켰다.
그 빈 공간을 채워줄 누군가를 필요로 해야 하는가? 혹 그의 존재가 '자발성이라는 박제된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계기가 되지는 않을까? 우리는 이 위기를 순탄하게 넘어가는 지혜를 발휘하지 못했다. 어느 만큼은 우왕좌왕하며 보냈다. 아무튼 지난 시절 형성된 우리다움에 대한 자긍심만 훼손될 뿐, 대안을 떠올리는 덴 적지 아니 무능했던 것이다.
물론 대안을 모색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돌아보면 숨막히도록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다. 그 중 가장 커다란 모색을 들면 아마 이런 것들일 게다. 첫째로, 다른 교회 혹은 다른 신앙 집단과의 통합 모색을 들 수 있다. 재정적으로도 보탬이 될 뿐 아니라, 상이한 경험과 기능이 상호간의 결점을 보완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서 말이다. 그만큼 당사자들 간의 관계 또한 긍정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넘어서야 할 고비들을 넘어서기 위해 좀 더 있내심을 발휘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통합이라는 기획 자체가 허망한 것인지도.
하지만 아마도, 가장 심각하게, 그리고 가장 치열하게 탐구되었던 과제는 목회사역자 문제였을 듯 싶다. 이것은 비단 '누구?'라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였다. 왜냐하면 인물의 문제는 동시에 교회관의 문제이기도 했던 것이다. 거칠게 말하면, 한백의 태동 정신이던, '새로운 교회'라는 실험을 후퇴시킬 것인가 아니면 지속시킬 것인가의 문제였다.
새로운 메시지뿐 아니라, 예배의 새로운 형식, 새로운 찬송가, 새로운 기도 형식, 교인 구성의 새로운 형식 등, 전통으로부터의 과격한 단절이 그간의 한백의 특징이었다면, 어느 만큼은 교회 전통과의 제휴가 한백의 근본적인 지향을 더욱 활기차게 할 것이라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반면 한백 나름의 일탈적인 시도 자체가 한백의 값진 실천이었고, 한백의 얼은 이러한 외양적인 실험 속에 분리할 수 없이 혼융되어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어느 입장도 진지하지 않은 것은 없었고, 어느 길도 그 가치를 격하시킬 수 없다. 단지 선택에 따른 상이한 진리의 효과가 있을 뿐. 당시 우리는 어떤 일관된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 나름대로 심사숙고한 선택을 내렸건만, 엉뚱한 이유로 번번히 무효로 돌아가곤 했다. 어떤 경우엔 부주의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운이 맞아 떨어지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이 더욱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외형상 우왕좌왕하는 듯이, 동요하는 모습을 띠었다. 그러는 동안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갔다.
1994년 6월경, 최악의 여건이라는 자괴적 판단 아래 다시 한번 대안을 모색하는 시도를 했다. 소위원회가 꾸려지고 수차례의 토론회가 열렸다. 그리고 1994년 8월 일련의 기획을 가지고 연남동 行을 결정하는 것으로, 4년반 남짓 보냈던 사당동 시절을 마감하게 됐다. 사당동 시절의 대부분을 나는 천안에서 보냈다. 그래서 부득불 주일 예배 이외의, 교회를 위한 논의 과정에 깊이 개입할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회피할 수 있는 좋은 변명거리로 삼곤 했다.
이 시절을 회상하며 많은 고통을 감당했던 여러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먼 곳에 있다는 핑계로 무거운 짐을 함께 지지 않았던 것에 사죄의 마음을 품으며. 그렇기에 나는 사당동 시절의 한백의 방황과 절망을 더욱 소중히 여기고자 한다.
지금만큼 혹은 보다 더 큰 기쁨과 희망이 우리를 감싸 안을 때, 그것은 틀림없이 사당동 시절의 아픔을, 그리고 그 어려움을 감내한 이들의 눈물을 자양분으로 하여 얻게 된 결실이기 때문이다. 우리와 시련을 함께 함으로 우리의 기쁨을 우리만큼 반기실 하느님! 이 모든 슬픔과 기쁨, 좌절과 희망, 나약함과 강건함으로 우리가 날로 성숙할 기회를 맞이하게 된 것, 감사드립니다.
- 김진호
한백이 연남동, 민주언론운동협의회'의 한 공간을 얻어 예배를 시작한 것은 대략 94년 가을 경이었다. 방배동 4층 전세를 포기하고 연남동으로 옮겨와 다른 단체와 더부살이를 이룬 것은 당시 한백이 처한 상황에서 비롯되었다.
방배동 시절 한백은 교회 공간의 유지와 운영에 있어서 상당한 재정적 압박을 받았다. 건물주로부터의 전세비 인상 요구는 당시 교회를 이끌어 가던 사람들한테는 매번 골칫거리였다. 이와 더불어 교회의 전담 목회자가 부재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재정적 취약과 지도력의 불안정성은 교회로 하여금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이러한 문제 상황에서 당시 교회의 몇몇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수차례에 걸쳐 논의를 거듭한 끝에 두 가지 방향으로 교회의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첫째는 당분간 독자적인 공간을 얻기 위한 욕심은 포기하는 것이었다. 전세비 마련, 더 나아가 완전한 교회 소유의 공간을 얻기 위해서 쏟는 정신적·물질적 열정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자는 것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사용하는 공간 때문에 우리가 겪고 있는, 그리고 겪게 될 소모적이고 비생산적인 골칫거리에서 벗어나 한백의 정열과 관심을 교회 밖의 선교 사업으로 확장시키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한백의 존재 의의를 자기 보존과 유지에 급급하기보다는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시였다.
또 하나의 중요한 결정은 한백교회의 평신도 중심 교회로서의 위상을 더욱 확고히 하자는 것이었다. 한백은 시작부터 평신도의 지위와 역할이 중요하였지만, 방배동 시절 말기의 목회자의 공백은 한백으로 하여금 새로운 결단을 촉구하게 하였다. 그래서 한백은 교회의 운영 전반을 총괄하는 전임 목회자를 구하는 대신에 기존에 있는 평신도의 지혜와 역량을 최대한 이끌어 내어 평신도가 교회 살림과 운영에 실질적 주인이 되는 명실상부한 평신도 공동체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이와 같이 교회 소유 공간의 포기와 선교적 역량의 강화, 목회자 일인이 아닌 다수 평신도 중심의 공동체로 한백은 새로운 단장을 하게되면서부터 한백의 연남동 시절은 시작된다. 연남동 시절 한백은 이러한 원칙하에서 예배와 친교, 선교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평신도 교회로서의 한백의 모습은 교회 운영 전반에서 구체화되었다.
예배를 준비하고, 나누며 친교하는 현장에서 평신도의 자발적 참여를 최대한 끌어내려고 노력하였다. 하느님의 뜻과 진리를 독점하고 있는 '고상한' 목회자께서 우매한 평신도를 일깨우는 일방향의 예배가 아니라, 누구나 불완전하지만 하느님과 교통함을 믿으며 서로의 관계 속에서 하느님의 진리를 체험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예배의 문을 열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열린 예배로서 한백예배는 한편의 드라마로서 누구나 주연의 역할을 담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경꾼이나 방관자는 원래 한백예배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예배 순서 곳곳에서 평신도들은 자기의 역할을 다함으로써 하느님의 진리의 한 부분씩을 채워나갔다. 특히나 '하늘뜻 나누기' 시간에는 한백예배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 공동설교라는 것이 처음으로 연남동 시절에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한 달에 한 두 번씩 성서 속의 사건이나 인물, 현실의 신학적 소재를 가지고 설교 시간에 모든 사람들이 참가하여 뜻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이 시간은 예배 참가자 전원이 목회자가 되는 것이요, 하느님 말씀의 전파자의 역할을 해야만 하는 평신도 예배의 한 전형이 되지 않을까 싶다. 비록 나중에는 교인들의 준비되지 않은 참가로 그 의의가 무색하게 되어 결국 다른 방법으로 대체되었지만 설교자 한 사람의 역할에 좌우되는 일반 예배에 대한 한 대안으로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한 편의 예배를 빛나게 하기 위해서 아침 일찍 나와서 교회를 정돈하고, 예배 후 애찬을 마련하며 그 뒷정리까지의 모든 것 역시 예배 못지않게 평신도들의 지혜와 정성이 깃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전에는 교인들 중 몇 사람한테 집중되어서 임의적으로 시행되던 순서들이 연남동 시절에는 어느 정도 틀이 잡혀서 안정적으로 준비·실시되었다.
전교인을 대상으로 봉사 담당을 5개 조로 편성하여 한 주씩 돌아가면서 맡은 조가 아침 정돈, 애찬 마련, 설거지까지 수고와 봉사를 하게 되었다. 하찮은 일 같지만 이러한 기회를 통하여 우리들은 섬김을 공동체 내부에서 훈련하고 익힐 수 있었던 것 같다.
평신도 교회와 함께 한백이 내세운 기치 가운데 하나인 선교적 역량의 강화는 작지만 소중한 몇 가지 일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초기에는 매달 예배 후에 선교 토론 마당을 열어서 한백의 현실적 문제와 선교에 대한 교인들의 고민과 뜻을 나누는 기회를 가졌는데, 몇 차례의 논의 끝에 우리들은 한국의 장기수 선생님들과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장년부와 청년3부가 장기수 선생님께 정기적으로 영치금을 보내드리게 되었고, 청년 1, 2부는 < 한겨레 21 > 등의 잡지를 장기수 선생님 다섯 분한테 정기 구독을 해드렸다. 물질적 후원이 계기가 되어서 몇 몇 선생님들과 교인들이 서신 교환 등으로 그 인연을 더욱 깊게 하게 되었으니, 한백은 이제 조금씩 시선을 나의, 우리의 문제뿐만 아니라 남의, 다른 사람의 고통에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평신도 교회의 이상이 예배를 열어 놓음으로써 하느님과 교인들 사이의 교통과 관계를 새롭게 회복하고자 하였듯이, 선교 공동체로서의 한백은 교회를 자기 유지의 폐쇄적 틀에서 벗어나 이웃과의 관계를 위해서 교회 자체를 활짝 개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웃과의 관계성 회복은 한백이 처한 각각의 상황에 맞게 다각적이고 시의적절하게 계속 추구되어야 하는 주제일 것이다.
이 시기에는 또한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신학과 사회과학 학습을 함으로써 사회와 역사를 보는 안목을 넓혀 나갔다. < 한백노래집 > 개정판이 창립기념예배를 통하여 나왔고, 교회 달력 제작도 이 시기에 처음 시도되어 매년 이어지게 되었다.
한백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자연사의 순리가 그대로 적용된 듯싶다. 사랑과 이별, 탄생과 죽음의 법칙 속에서 어떤 쌍은 사랑이 맺어졌고, 새로운 생명이 탄생되기도 하였다. 누구는 헤어짐과 떠남의 아픔을 맛보기도 하였으며,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난 분도 계셨다. 한백의 새로운 식구가 된 사람이 있는 반면에 한백을 잠시, 아니면 그냥 멀리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홍대 앞 '고호'라는 까페가 한백사람들의 아지트로 자리잡기 시작하였으며, 이 때부터 한백사람들이 맛난 음식을 찾아 연남동 일대를 배회하기도 하였다. 2년이 채 못된 시기지만 연남동 시절 한백은 독특한 경험을 한 것 같다. 모든 것이 열려 있어서 누구나 주인이 되어 어떤 것이든지 생각하고 행동해 나갈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던 것이다. 실제로 거듭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도 많은 것들이 구상되고 시행되었다. 어떤 것들은 한백의 귀중한 전통으로 정착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자유가 주어졌을 때, 우리들은 그 자유의 주체가 되기보다는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경우가 많았다. 책임있는 주체로서 평신도 상을 만들어나가기보다는 우리 내부에 어떤 카리스마적 권위를 시종 동경해왔는 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먼저 남을 사랑하고 위로해 주기보다는 사랑받고 위로받기를 원했다. 아직까지 우리들은 나약했던 것이다. 인간은 자기 존재가 불안할 때 물음을 던지기 시작한다. 존재의 불안을 초월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다. 연남동 시절 한백은 불안하였다. 우리 공간이 아니었기에, 누구나 주인이 되어야 했기에 불안하였다.
한백은 그러한 진통의 과정 속에서 많은 질문을 하였다. 신에 대하여, 우리 공동체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들 각자에 대해서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한백이 기우뚱하면서도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물음의 제기와 그에 대한 대답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안정된 공간을 확보하고 실무자의 힘이 강화된 지금의 한백은 과연 무엇을 고민하고 있나.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들이란 무엇일까.
지금의 한백이 연남동의 경험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바로 묻고 대답하는 가운데 자기를 성장시켜나가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 도홍찬
연남동에서 과천으로, 이사온 지 벌써 1년하고 4개월이 지났다. 처음 이 예배터를 보러 지하철 과천역을 나섰을 때 5월을 신록이 따스한 햇살과 함께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새로운 예배터를 찾아온 우리를 과천은 최고의 것으로 반겨 주었다. 그 좋았던 기분, 가슴 설레임은 앞으로 있을 어떤 어려움도 거뜬히 해결해 나갈 힘을 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리고 1년 4개월. 그렇게 가슴 벅차게 시작했던 과천의 출발과 길지 않았던 시간들을 지나, 이제 이곳에서 한백의 열돌을 맞이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열심히 달려왔던 10년의 세월을 뒤로 하고, 또 하나의 시작, 새로운 푯대를 향해 달려나갈 곳이 이곳 과천예배당이라는 생각으로 길지 않은 과천에서의 생활을 돌아보고자 한다.
연남동 예배터. 그곳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느님을 예배하도록 허락한 성막같이 초라하지만 매주 마음 편하게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오후에는 신앙학습도 할 수 있었던 소중한 예배터였다. 그러나 예배를 준비하고 모임을 가지면서 우리의 공간이 없다는 것이 한백의 미래를 더 이상 꿈꾸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로 생각됐다. 비록 매일 모이는 것을 아니지만 우리의 예배터가 또한 우리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많은 교회들이 있음에도 이 땅에 한백을 세우신 것은 분명히 하느님의 뜻이 있었을 것이다. 한백이 해야 할 역할을 아직 다하지 못했다면 이제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기도였다. 우리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달라는, 내년에는 분명히 열매를 맺어보겠다는 간절한 소망이기도 했다. 그 기도가 어느 날 현실로 다가왔다.
과천에 좋은 예배터가 있다는 말을 들은 것이 작년 부활절 예배(1996년, 4월)를 드린 직후였다. 나는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월세나 전세가 아닌 그야말로 우리집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물론 교회로서는 적지 않은 부담이었고, 걱정도 되었다. 그러나 돌이키기 싫었고 한 번 부딪혀보고 싶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마지막 기회가 아닐까 라는 생각에 놓치고 싶지 않았다.
막상 이사를 결정하고 보니, 살림살이가 거의 없었다. 안 박사님은 얼른 이사가서 바닥에 앉아서라도 예배를 드리자고 했지만, 일을 맡은 사람들로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어 살림살이들을 장만하기로 하였다. 책장, 전자오르간, 헌금항아리, 상, 그리고 얼마간의 식기들이 우리에게 남은 살림들이었다. 앞으로 우리의 공간을 가질 희망을 포기한 채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사랑을 나누어 주었다는 말이 황당하게 생각되었지만 이렇게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의 새 예배터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몇 가지 원칙들이 세워졌다. 내가 생각한 원칙은 교회에 와서 주일을 보낼 때 한 주를 일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너른마당이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공동체 예배를 통해 격려와 힘을 얻는 것도 있지만, 한백식구들이 모여서 함께 예배드리고, 식사하고, 늦게까지 공부를 해도 떠나고 싶지 않은 그런 마음 편하고 넉넉한 공간이다. 아기 엄마들이 마음 편히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그런 예배터이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 아직도 마련되지 못한 채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어쨌든 이러한 마음으로 필요한 물품 목록을 생각해 보았다. 의자는 이사할 때 가장 신경을 쓴 물품이었고 우리 교회로서는 조금은 사치스러운 물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장시간을 앉아서 보내야 하는 우리들에게 이 정도의 사치는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사기로 결정을 했다.
좀더 싼 값으로 의자를 사기 위해 사당동으로, 황학동으로 뛰어다녔다. 덕분에 그 비싼(?) 의자를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었다. 지금은 청소할 때 너무 무거워 철제 의자를 샀더라면 하는 후회도 든다. 내가 이런 후회를 하지 않도록 한백식구들이 허리를 쭉 펴고 좋은 자세로 의자에 앉아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문제는 에어컨이었다. 한백식구 대부분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었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기보다는 에어컨은 한백과는 걸맞지 않고 사용하기에는 아직은 이른 물건이라는 생각이었다. 소박한 생활 속에 더위를 이겨나가는 것이 더 한백답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것은 놀라운 발견이었다. 이런 생각 때문에 한백은 지금까지 올 수 있었고, 앞으로도 비록 작고 초라하지만 이어나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우리의 예배와 모임에 에어컨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접을 수가 없었고, 결국 김 목사님의 동의를 얻어 무리하게 사기로 결정을 하였다. 지난 1년간 에어컨 덕분에 시원하게 모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물론 없었어도 우리의 모임에는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한백이다.
좀더 좋은 물건을 싸게 사기 위해 서울을 반 바퀴를 돌았든 것도 이제는 먼 옛날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서 급하게 이사비용을 내 주었던 한백식구들의 정성으로 필요한 것들을 살 수 있었다. 또한 주변의 사람들이 기꺼운 마음으로 내 주었던 크고 작은 물건들이 우리의 새 예배터를 채워가고 있었다.
새 예배터로의 이사에 빼놓을 수 없는 얘기는 예배터의 새 단장일 것이다. 6월 6일 현충일에 작업복을 입고 청소와 페인트칠 그리고 벽지를 새로 바르기 시작했다. 방안의 발포벽지를 칼로 일일이 다 떼어내는 일, 섬세함과 기술을 필요로 했던 실크벽지. 고개 아프게 발라야 했던 천장의 페인트칠, 처음으로 이런 일들을 했던 한백청년들의 땀이 지금 우리의 공간을 환하고 깨끗하게 밝히고 있다. 마지막으로 깔린 푸른빛 바닥이 우리의 새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6월 9일. 우리는 과천으로 이사를 왔다. 안 박사님 내외분이 매주 예배에 참석하셨다. 조병현 씨가 과천에서의 새 식구가 되었다. 예배순서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공간의 구조상 자리를 정렬하여 앞을 바라보고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너무 교회 같은 모습이 불만이었고, 그래도 정면에 십자가가 있어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공간이 우리에게 허락되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그것은 우리들이 갚아나가야 할 과제를 전제한 것이기는 하지만.
마침내 6월 마지막 주일에 우리의 새 예배터를 하느님께 바치는 예배를 드렸다. 오후 3시에 우리의 새 출발을 축하해 주는 많은 손님들과 한백식구들이 진정한 기쁨과 감사함으로 예배를 드렸다. 때맞춰 발행된 『너른마당』1호는 과천에서 제일 처음 이룬 성과이다. 그 때 구성된 편집부는 지금 10주년 특집호까지 탄탄한 한백의 또 하나의 축을 이루고 있다.
과천에 와서 이룬 또 하나의 변화라면 5기에 이르기까지 성서교실을 진행해 온 것이다. 매주 목요일 두 시간에 걸쳐 10회의 강좌를 4번 했고, 지금은 다섯 번째에 이르렀다(1997년 10월 기준). 신구약성서를 지난 1년간 공부해 온 것이다.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좋은 강의 덕분에 두 사람의 귀한 식구들이 생겼다. 매회 강의를 위해 적어도 일주일에 하루씩은 밤을 새는 목사님의 수고의 열매를 더 많은 한백식구들이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과천에서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다면 안 선생님이 우리의 곁을 떠나 하느님과 함께 지내게 되셨다는 것이다. 작년 아홉돌을 기리는 예배를 준비하던 19일 새벽에 안 선생님은 떠나셨던 것이다. 안 선생님께서는 과천에 이사와서 힘드신 가운데서도 매주 예배에 참석하시려고 애쓰셨고, 한 달에 한 번씩 말씀을 전해주셨다. 나는 그런 안 선생님의 모습에서 아직 제자리를 잡지 못한 막내자식을 안쓰러워하시며 마지막 정성을 쏟으시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분이 말씀을 전하실 때면 어른들은 그분의 마음을 읽으시기라도 하듯 일찍이 자리를 채우셨으나, 젊은 우리들은 그분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했다. 너무나 큰 그분의 빈자리를 어떻게 채워나가야 할지 막막하지만, 매해 한백의 생일과 더불어 맞이하게 되는 안 선생님의 추모일은 우리에게 한백이 가야 할 방향을 놓치지 않는 길잡이가 되리라 생각한다.
지금까지 나는 연남동에서 과천으로 이사온 과정을 말하였다. 너무나 갑자기 결정을 내렸고 급하게 이사를 준비했다. 그래서 미진하고 아쉬운 부분들이 있다. 아이들의 방이 그렇고 부엌이 그렇다. 그것은 일을 맡아 준비했던 나의 능력의 부족이었고 시간과 금전이 그렇게 밖에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감사한 것은 우리의 예배터를 마련한 뒤로 필요한 것이 있으면 그 필요를 느낀 사람들이 직접 채워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난방기, 냉온수기, 냉장고와 같은 비교적 큰 물건뿐만 아니라 화분과 주전자와 국자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느끼고 준비해오는 것이었다. 조별 식사가 풍성하게 매주 준비되고 있고, 이렇게 나누는 공동식사는 이제 우리의 자랑이 되고 있다.준비하는 음식 하나하나에도 이전보다 더 많은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책임이 녹아들었다고 생각한다.
매주 예배를 준비하면서 내일은 이 예배터에서 누구누구를 만나게 될 것인가를 생각한다. 예측할 수 없는 예배 참석은 때때로 준비하는 손에서 힘을 뺏고는 한다. 그리고 그것은 조급함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좀더 빠른 성장과 안정적인 모습에 대한 희구가 그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야훼를 떠나 바알종교에 몸과 마음을 던지고 싶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꼈던 유혹이기도 하다. 또한 한국 교회가 모두 앓고 있는 병이다. 비록 늦고 힘들지만 끈기있게 우리가 달려갈 길을 가야할 것이다. 계속해서 우리들은 참된예배와 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위해 애를 쓸 것이다.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한백이 나아가게 될지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우리 시대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이웃과 더불어 나누고 섬기는 삶을 실천하는 한백이고자 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으리라 생각한다.
과천으로의 이사는 이러한 지향을 새롭게 하는 또 하나의 시작이 될 것이다.
- 백정숙
2년 전에, 신학교 리포트 중의 하나로 자신이 출석하고 있는 교회의 역사를 써 보라는 리포트가 있었다. 그 때 나는 과천 시절을 서술하면서 그 제목을 '정착, 그리고 새로운 岐路'라고 달았다.
2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크게 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과천의 한백은 용두동, 사당동, 연남동 시절에 비하면 많이 안정된 편이다. 그리고 교회의 성격도 많이 바뀌어 가고 있는 편이다. 이런 모습에 대해 간단히 스케치를 해 낼 수 있다면 이 글의 구실로 족할 터이다.
6월 어느 휴일날 과천의 한 건물 6층에 사람들이 모였다. 천장에 페인트를 칠하고 안방의 도배를 뜯어 내고 새로 도배를 했다. 정작 그 때 나는 다른 약속이 있어서 잠깐 동안밖에 있지 못했다. 입당 예배를 드리기 위한 노래 선교부 연습과 더불어 나는 입당 예배에 맞추어 발간된 < 너른마당 > 창간호에 글을 기고한 사람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안병무 박사님과 조병현 선생님을 뵙게 되었다.
과천으로 이전한 그 해 교회 창립주일을 앞둔 금요일 날 과천으로의 이사를 주도하셨던 안병무 박사님이 돌아가셨다. 그 해 창립주일 예배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어쩌면 그 울음소리는 한백의 한 시기가 저무는 소리였는지도 모르겠다. 그 후 한백은 많은 변화를 했으니까.
연남동 시절 말기부터 교회의 지도력의 중심이었던 김 목사님-백 선생님의 과천에서의 첫 작품은 < 한백성서교실 >이었다. 나는 그 때 다른 사정으로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학교 후배들이 열심히 참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다음해 신학교에 진학했을 때 가장 먼저 하게 된 교회 일이 바로 이 < 한백성서교실 >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경희 씨와 지연 씨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곧 경희 씨와 지연 씨는 경희 누나와 지연이 누나로 바뀌게 되었다. 그 다음에는 김봉숙 선생님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곧 김봉숙 선생님의 얼굴을 목요일뿐 아니라 일요일에도 뵙게 되었다. < 한백성서교실 >은 지금까지 교회에서 일요일 아닌 날에 하는 유일한 교회 행사로 계속되고 있다.
어쩌면 < 한백성서교실 >이 교회에 하고 있는 가장 큰 기능은 새롭게 교회에 출석하게 되거나 다시금 교회에 관심을 갖게 되는 사람들을 교회에 적응하게 하는 기능인지도 모르겠다. < 한백성서교실 >에 계속 참여해 온 사람들끼리의 결속력도 상당하니까. < 한백성서교실 >의 예에서 보듯이 과천의 한백에서 바뀐 것은 무엇보다도 '사람'이다.
'사람' 중에서도 특히 '과천 사람'이 많아졌다는 것이 그 전하고 구별되는 특징이겠다. 사당동이나 연남동 시절에 '사당동 사람'이나 '연남동 사람'을 별로 못 보았다는 것과 비교한다면. 먼저 장로님의 가족과 친척분들이 적극적으로 나오시기 시작했다. 나는 장로님 사모님을 과천에 와서 처음 뵈었다. 그리고 조병현 선생님을 과천에서 뵙게 되었다. 사당동이나 연남동 시절엔 그렇게 자주 보지는 못했던 화영이와 영석이의 얼굴도 매주 보게 되었다.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과천에 있는 교회'를 찾아 온 '과천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경희 누나의 경우는 앞에서 이야기한 바이고, 오미경·신의주 선생님의 경우나 최성이·김영석씨 부부의 경우처럼 '과천에 있는 괜찮은 교회'를 찾아 온 사람들도 생기게 되었다. 새로운 사람들만 늘어난 것이 아니라 오랫 동안 모습을 뵙기 힘들었던 분들의 모습을 다시 뵙게 된 것도 또다른 특징이기도 하겠다.
고안언, 곽명옥, 정혜란, 김승호 선생님의 모습을 전보다는 자주 뵙게 되었다. 김호철, 박미현, 박기용 선생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김승호 선생님에 의해서 지금 이 글이 올라갈 홈페이지가 만들어지고, 지연이 누나와 오미경 선생님이 같이 일하게 되었으니, 이런 걸 두고 '신구의 조화'라고 칭하면 지나친 일일까?
젊은 청년들은 취직, 전근, 결혼, 득녀/득남 등의 일을 많이 겪게 되었다. 서른 두 살 밑의 사람들 중에서 과천 시대에 이런 일들을 하나도 안 겪은 사람은 아마 거의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일들, 이런 생활들 속에서 또다른 인연이 맺어지기도 한다. 덕분에 과천의 한백은 특정 직업, 특정 직장에 속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아지게 되었다. 인성여고 지부나 당곡중학교 지부를 만들어도 될 법 한데.......
이렇게 다양해진 사람들로 상징되는 과천 시대의 변화 속에서 가장 많은 수고를 하신 분이 있다면 역시 백 선생님일 게다. 스스로 '가짜 목사'라고 선언하고 다니는 목사와 일 잘 못한다는 이유로 운영위원에서 쫓겨나기나 하는 후배 신학생(나) 사이에서 백 선생님은 자연히 교회 일의 상당한 부담을 질 수 밖에 없으셨다. 동시에 부담을 지는 만큼 새롭게 변화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깊으셨고, 그 사람들이 정착을 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셨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듯 하다.
앞에서 내가 신학교 진학 이후로 가장 먼저 하게 된 일이 < 한백성서교실 >이라고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몇 개월 정도 하다가 시간 관계로 하기 힘든 사정이 되었다. 결국 백 선생님께 도로 일을 돌려 드릴 수 밖에 없었다. < 한백성서교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일들 치고 백 선생님의 손을 거치지 않는 일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백 선생님이 사임하신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앞으로 교회 밥 누가 하지?'라는 말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올 정도였으니까.
그 많은 일들 중에서도 백 선생님이 가장 수고하신 일은 역시 한백의 역사상 처음이었던 '어린이 주일학교'가 아닐까 싶다. 한백의 구성원들이 '생활인'이 되어 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요구되는 '어린이 주일학교'를 백 선생님이 맡아서 많은 수고를 하셨던 것이다. 가끔씩 보조 교사 노릇을 한다고 가 보면 백 선생님에 대한 아이들의 애정이 만만찮았다. 심지어 다른 교회 아이들까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전도사'라는 직함을 달고 있음에도 '어린이 주일학교'를 못 하는 것을 생각하면 백 선생님의 수고를 더더욱 깊이 느낄 수밖에.
이런 변화를 겪어 온 과천의 한백은 올해 들어 또다른 중요한 변화들을 겪고 있다. 홈페이지의 개설은 일요일 외에는 별다른 소통의 공간이 없던 한백에게 또다른 소통의 공간을 마련해 주고 있다. 물론 아직은 많은 교인들이 참여하지 못하고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일부의 교인들만이 참여하는 공간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적어도 인터넷 안에서 생각을 나누는 교인들끼리의 소통은 상당히 많이 나아진 편이다. 앞으로 인터넷 저변이 점점 더 넓어지면 그만큼 소통할 수 있는 사람들도 많아질 터이다.
그리고 한백의 외부에 있는 사람들과도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점점 더 넓어질 조짐을 보인다. 한백의 홈페이지 안에서는 김 목사님이나 나도 목사와 전도사로 만나지 않는다. '진호/올빼미'와 '황용연'으로 얼굴을 내밀고 '진호님'과 '용연님'으로 만나게 될 뿐이다. 그리고 한백의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모두 평신도들이다. 김 목사님-백 선생님 시절을 거치면서 '목회자'의 힘이 상당히 강화된 한백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한백의 가장 중요한 이상인 '평신도 교회'를 지속해 나갈 수 있는 물질적 기반을 한백의 홈페이지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무리는 아닐 듯 싶다.
얼마 전 김대중 대통령이 광복절을 맞아 양심수.장기수들을 대폭 사면하고 국가보안법을 개정 또는 대체입법하겠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사면 대상으로 거론되는 장기수분들의 이름을 보니 현재 한백과 서신교환을 하는 장기수분들의 성함이 모두 들어가 있다. 작년에 석달윤 선생님이 석방되시고 올해 안영기.오형식 선생님이 석방되시면서 오랫동안 한백의 전통이었던 장기수 후원 사업은 질적인 전환을 맞게 되었다.
이제는 감옥에 있는 분들을 후원하는 것만이 아니라 출소한 분들과 생활 속에서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도 문제가 되는 것이다. 과천에 있는 장기수분들의 거처와 일터는 모두 '한백'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그리고 한백의 여러분들이 거처와 일터로 자주 찾아뵙는다. 일요일 예배 후 장기수분들의 일터인 고서점에서 한백 식구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이제 상당히 낯익은 풍경이다. 그리고 한백 식구들과 맺는 관계에 상당히 감사하시는 장기수분들의 모습을 종종 뵙게 된다.
1999년 과천의 한백은 이렇다.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그런 중에서도 나름대로의 방향을 잡아 가고 있다. 물론 현재의 과천의 한백의 모습에 나름대로의 기쁨과 불만을 다들 가지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기쁨과 불만을 서로 나눌 수 있는 공간을 어느 정도 같이 만들어 가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공간 만들기'가 계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2년 전 리포트의 마지막 구절을 다시 한 번 인용해 보려 한다. "그리고 한백교회는 이런 내용들까지를 품어 안는 보금자리가 될 것이다. 한백교회의 원사건이었던 뜨거운 열정과의 조화를 이루어 가면서. 그 조화의 모습이 어떨지는 아무도 장담을 못한다.
♣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 '조화'는 언제까지나 존속할 것이라는 우리들의 '믿음'이다. ♣
- 황용연
새천년으로 넘어오는, 시간 속에서 < 한백의 집 >과 < 한백헌책방 >은 한백식구들에게 또 하나의 특별한 공간이 되었다. 그리고 감옥 밖에서 생활인으로서의 삶을 꾸려가게 된 출소 장기수분들에게 한백은 특별한 공간이 되었다.
그 특별한 공간 속에서 나누던 삶의 시간들이 의외로 빨리 마감된 것은 새천년 첫 해에 있었던 남북정상회담 때문이었다. 그 분들이 가시고자 하는 곳으로 가시게 된 것은 축하를 아끼지 않을 일이었지만, 동시에 섭섭한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분들이 떠나시고 난 빈 자리를 박종린 선생님이 채우셨다. 박종린 선생님과 새로운 삶을 나누게 된 다음해부터, 한백은 지금까지와는 상당히 다른 구조의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 첫 걸음은 창립된 지 14년만에 ‘조직교회’가 되는 것이었다. ‘조직교회’가 되는 자리에서 홍근수 목사님의 축사는 축사인지 조사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것이었지만, 오히려 그렇게 구분이 되지 않았기에 한백에 걸맞는 축사가 되었다는 점은 한백식구들이 공감하는 바였을 게다.
그 다음 걸음은 ‘공동목회’의 시작이었다. 2002년 한백은 새로운 공동목회자 양미강 목사님을 맞았다. 그리고 양미강 목사님과 함께 15주년을 맞았다. 15주년을 맞아 한백은 신앙고백문을 새롭게 제정했다. 새로이 제정된 신앙고백문을 예배 때마다 함께 읽으며, 한백은 ‘가려지고 잊혀지는 희생양의 얼굴과, 모든 비통한 눈물들을 외면하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
그리고 그 다음 걸음. 필요한 때마다 약속의 땅을 찾아 떠나는 아브라함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한백은, 또 한 번 아브라함이 되기를 자청한다. 안정을 제공해 주었지만 선교의 가능성에서 제약을 받았던 과천 예배터를 떠나, 한백의 사명에 걸맞는 선교를 새롭게 시작하기 위하여, 한백은 다시금 서울로 이전할 것을 결의한 것이다. 그리하여 한백의 다섯 번째 예배터는 2003년 12월 10일 서대문에 세워진다. 새로운 예배터를 한백은 ‘안병무홀’이라 이름지었다.
17년 전, ‘가려지고 잊혀지는 희생양의 얼굴과, 모든 비통한 눈물들을 외면하지 않는’ 교회 하나 만들어보겠다고 하셨던 안병무 선생님. 한백의 새로운 예배터가 ‘안병무홀’인 것은, 그 새로운 예배터에서 시작하려는 새로운 선교가, 바로 이러한 안병무 선생님의 정신으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일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안병무홀’은 지난 3월 28일 개관하는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한백의 새로운 선교도 막 시작단계에 놓이게 되었다. 안정된 공간을 박차고 나와 모든 민족에게 복의 근원이 되었던 아브라함처럼, 안정된 과천을 박차고 나온 한백의 선교도 한국 사회에 복의 근원이 되기를 한백은 빌고 있다. 아마도 앞으로 그러한 기원과 실천은 계속될 것이다.
- 양미강
♣ 이 글은 1997년 10월에 발간된 너른마당 4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